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트 2세 (문단 편집) === 즉위 === 하지만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을 '수습' 이 아니라 '거의 수습' 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스타파 첼레비(Mustafa Çelebi)라는 인물 때문. 그는 자신이 메흐메트 1세의 형제이자 [[앙카라 전투]] 당시 아버지 [[바예지트 1세]]와 함께 티무르군에게 포로로 잡인 무스타파 왕자라고 자칭하고, [[티무르]] 사후에야 풀려났다고 주장하며 메흐메트 1세 때에 느닷없이 나타나 '내전을 수습한 건 잘 했으니 왕국을 둘로 나눠먹자' 며 반란을 일으켰다. 메흐메트는 그를 쉽게 제압했지만 무스타파가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고, 동로마 제국에서는 '망명자를 죽이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고 둘러대며 무스타파를 계속 인질로 붙들게 된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티무르의 침공으로 인한 오스만 제국의 분열로 상당한 이익을 봤었던 만큼, 무스타파라는 뇌관을 향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보험으로 두려고 했던 것. 과연 메흐메트 1세가 죽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후계자인 무라트가 아직 어리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득을 얻기 위해 무스타파를 풀어주었고, 무스타파는 즉각 2차 반란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반란은 손쉽게 진압되었는데, 먼저 미할오을루(Mihaloğlu) 가문이 무라트의 편에 섰다. 이 가문은 본래 로마인이지만 [[오스만 1세]]에게 항복하여 조언자 겸 외교관 역할을 했던 쾨세 미할(Köse Mihal)이라는 인물의 자손인데, 비록 재상을 비롯해 중앙 관료들이 다수 나오지는 못했지만 루멜리아(Rumelia)[* 무라트 2세 시대 기준으로는 오스만령 유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중간급 관료들과 지휘관들을 여럿 배출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무라트의 군사적 재능이 아직 십대 청소년인 것치고는 대단히 뛰어났던지라 무스타파는 포로로 잡혔고, 무라트는 그를 교수형에 처했다.[* 이 무스타파라는 인물이 정말 왕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일단 오스만의 공식 입장은 '무스타파는 사기꾼'이라는 것. 왕족을 죽이는 것 자체는 빈번했을지라도 교수형으로 죽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무라트가 그에게 교수형 처분을 내린 것은 그가 참칭자에 불과했다는 대외적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